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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그녀의 이름은 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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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의 설렘 2017.07.17

 

비가 오는 여름날, 학교 선배와 강남에서 맥주 한잔 하고 있었다. 비가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안주삼아 마시는 맥주의 목넘김이 시원했던 그때 카톡 하나가 왔고, 학교 후배가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생과 소개팅을 해보지 않겠냐며 사진을 보냈던 그 순간이 픙제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다. 사진 속 픙제는 풋풋하게 생긴 갈색의 단발머리 소녀였고 친구와 정면을 응시하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소녀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기에 후배에게 바로 소개팅을 해보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곧 카톡으로 그녀와 2017년 7월 14일에 보기로 약속을 잡고 그날의 마지막 카톡으로 보노보노의 안녕 이모티콘을 보냈다.

 

2017년 7월 14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신천, 약속시간 즈음이 되어 그녀에게 카톡이 왔다. 그녀는 간호사였는데 병원 일정이 미루어져 늦을 것 같다며 미안하다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았기에 괜찮다고 천천히 오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늦게 나타난 그녀는 미안했는지 처음 눈을 1초 마주친 이후엔 음식점에 들어갈 때까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 짧은 1초는 그녀가 늦었던 부분을 잊기에 충분했다. 사진 속의 소녀는 머리카락이 더 길어졌고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 되어있었다. 피자집으로 가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사실 그때 어떤 대화를 했는지 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자와 맥주 사이에 타오르는 촛불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촛불이 밝히는 짙은 갈색의 테이블에 그녀와 나는 대화의 실을 만들어 이어나가고 있었다.

 

피자집을 나와 거리를 거닐며 그녀와 나는 다음에 할 무언가를 찾았다. 헤어지기 아쉬웠고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음은 틀림이 없었다. 여름의 밤은 더웠기에 베스킨라빈츠 31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가게의 에어컨이 고장 났기에 밖과 안의 기온이 전혀 차이 나지 않았다. 한국의 여름 날씨는 덥고 습한 것이 특징으로 사람의 기분을 매우 날카롭게 한다. 하지만 그날은 덥고 습한 날씨가 나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밖을 돌아다니며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을 즐겼다. 이후엔 게임장에 가서 다트를 했는데 다트를 가르쳐 주면서 그녀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담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학교 후배의 지인이기에 조심했어야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그녀를 놓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게임장을 나와 여름밤 신천과 종합운동장역 사이를 거닐며 계속 걸었다. 걷고 또 걸어서 지금 생각하면 약 8 천보는 걸었다. 그날 나는 그렇게 잘 걷는 여자를 처음 봤다. 평소 산책과 걷는 것을 즐기는 나였기에 부담이 없었지만 그녀 또한 걷는 것에 있어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걷기를 반복하며 서로에게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지려고 할 때 즈음 나는 정말 잘 걷는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내일 영화를 보자고 애프터 신청을 했다. 바로 다음날의 애프터 신청에 그녀는 살짝 당황했지만 곧 승낙을 했다. 그렇게 우리의 걸음은 멈출 수 있었고 나의 애프터 신청이 없었다면 그날 우리는 걷기 말아톤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코엑스에서 인형탈 케어 알바를 하면서 귀여운 탈인형 사진들을 찍어 그녀에게 보냈다. 작은 것 하나라도 그녀와 관심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랐던 마음이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보낸 사진에 관심을 표현했고 첫 만남의 설렘이 계속 이어진다는 느낌을 얻었다. 곧 저녁이 되면 그녀를 보지만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알바를 마치고 강남역 CGV에서 영화를 보려 했지만 남는 자리가 없었기에 즉흥적으로 신사역으로 가서 식사 후 촛불을 안주삼아 맥주 한잔 했다. 신사역이 주는 중후함과 촛불의 은은한 불꽃이 비추는 짙은 갈색의 맥주잔, 그리고 그 잔 속에 들어있는 시원한 그라데이션 오렌지색의 맥주로 그녀와의 대화는 멈추지 않았고 즐거웠으며 부담이 없었기에 피곤한 줄 몰랐다. 그렇게 두 번째 만남을 마무리하며 이틀 후 한번 더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이날 그녀에게 다음 만남에는 고백을 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졌고 나는 멈추지 않는 8톤 트럭과 같았다.

내가 그녀와의 만남을 서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후배에게 소개팅 연락이 오기 전부터 잡혀있었던 제주도 여행이 18일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좋은 분위기로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고 해도 중간에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되면 약 5일 동안의 공백으로 다시 서로가 어색해질 것을 알았기에, 그리고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사실 멈추지 않는 8톤 트럭이 아닌 멈출 수 없는 8톤 트럭이었다. 그리고 곧 다가오는 2017년 7월 17일의 숫자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이날이 그녀와 나의 첫 사귀는 날이 되기를 바랐다. 17년 7월 17일은 기억하기 쉽고 잊기는 어려우며 내 딴에는 7이 세 개나 들어가기에 기분도 좋아지는 날짜였다. 2077년 7월 17일 전까지는 17년 7월 17일이 고백하기 가장 좋은 날임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것이다.

 

2017년 7월 17일, 그녀와 고속터미널역에서 영화를 보았다. 당시 개봉했던 박열이라는 영화, 즉흥적으로 정했던 영화로 포스터만 보고 결정했다. 그녀와 나는 히어로물로 생각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건 히어로물이 아니라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영화였고 내용은 좋았지만 재미를 원했던 우리에게 지루하게 느껴졌다. 영화를 보던 중 문득 그녀가 두 번째 만남에서 자신은 영화를 보며 조는 사람이 싫다는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나 잠깐 옆을 보았는데 역시 졸지 않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매우 크고 맑으며 빛나기에 눈이 떠져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영화는 별로였지만 이후 한강을 바라보며 맛있는 것을 먹고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 세빛섬으로 걸어갔다. 세빛섬에는 말 그대로 세 개의 빛나는 섬이 있는데 저녁이 되면 조명으로 세 개의 섬이 각각 찬란하게 빛난다.

 

세빛섬을 돌아다니며 나는 각을 보기 시작했다. 섬이 세 개나 있기에 기회는 충분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아직까지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고백을 하기 위해 좋은 장소를 찾으며 내 눈동자는 누구보다 빨랐고 남들과는 달랐다.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눈동자를 굴려야 했기에 생각보다 바빴던 것으로 기억난다. 첫 번째 섬을 돌면서 방금 보았던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두 번째 섬을 돌면서 주변의 예쁜 경관을 보고 눈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섬을 돌며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다 보니 세빛섬을 다 돌았다. 여기서 마음의 여유가 약간 사라졌지만 세빛섬에서 저녁을 먹으며 고백을 하는 것도 운치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보고 씩 웃어주었다. 저녁으로는 세빛섬에 있는 편의점 위에 식당에서 무언가를 먹었는데 매우 짰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녀와 나는 최대한 노력하며 맛이 있다고 표현했지만 서로 입 주변이 떨리고 있던 것으로 보아 상당히 짰었나 보다.

 

최악이었다. 세빛섬의 멋진 경관에서도 기회를 잡지 못했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너무 짜서 혀와 입이 마비되어버렸다. 영화부터 선택을 잘못했기에 그 잘못된 기운이 이어져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하며 집으로 가기 위해 식당을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그녀와 내가 잘 걷는 것이 첫날과는 다르게 왜 이렇게 싫게 느껴지는지, 이는 내 기분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 틀림없다. 세빛섬에서 고속터미널역 쪽으로 나가는 입구가 보이는 즈음, 나는 그녀를 불렀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 후회할 것이며 후회하는 기분으로 제주도를 간들 그건 여행이 아니라 유배를 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세 번 만나면서 나는 네가 참 좋게 느껴지는데 너는 어떤 것 같아?” 그녀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고 바로 다음 물음을 이어갔다. 거침없었고 장기로 치면 장군, 체스로 치면 체크메이트였다.

 “그럼 우리 한번 만나볼래?”

그녀는 대답했다.

“지금 만나고 있잖아.”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녀가 말한 “지금 만나고 있잖아.”는 “이미 우리는 사귀고 있는 사이야” 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는 지금 만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생뚱맞은 그녀에게 다시 사귀자고 언급했고 다행히 우리는 17년 7월 17일을 둘만의 기념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와 만난 지 4년, 우리는 크고 작은 다툼 없이 잘 사귀고 있다. 한때 그녀는 카톡으로 저녁에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표현에서 실수로 “-먹고시픙제”라는 글귀를 남겨 그 이후로 나에게 있어 픙제가 되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픙제라고 부른다.

 

함께했던 4년을 돌아보면 우리 사이는 2017년 7월 14일부터 2017년 7월 17일 사이에 보여줬던 모습들의 연속이었다. 여행이나 약속 등의 계획은 즉흥적으로 정하고 약속에 늦어도 당당하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서로 생뚱맞게 해 웃음을 자아낸다. 그런 그녀의 일관성 있는 모습과 나와의 신뢰관계는 흠집이 없었고 2021년 7월 17일 현재의 우리 둘을 만들어냈다. 픙제와 처음 만났던 기간인 4일이 4년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기에 앞으로의 40년도, 그 이후도 다르지 않음을 안다. 첫 만남의 피자맥주집에서 만들었던 대화의 실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매 순간순간 만들어지는 실의 색깔을 다르더라도 그 실은 폭신하고 부드러울 것이다.

 

여담으로 사귄지 1년즈음 되었을 때 첫 만남에 대해 픙제에게 물어보았는데 픙제는 첫 톡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보노보노이고, 신천에서의 첫 만남에 늦게 도착해 나를 보고 괜찮은 사람인데 늦어서 망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당시 샌들 인척 하는 슬리퍼를 신고 왔는데, 다행히 내가 발견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열 영화를 보면서 매우 졸렸지만 참았으며 나에게 영화를 보면서 조는 것이 싫다고 얘기했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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